거의 일 주일만에 일상으로 돌아온 듯하다. 지난 화요일 이후 길 귀신이 씌워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다. 휴일이 많아 남편과 함께 하기도 했지만 사이사이 날에도 '세밑'이라는 아련함 때문에 마음이 잡히지 않아 조금 많이 걸었다. 오늘은 금요일, 아들에게 다녀오는 금요일 오후는 그냥 마음이 아득하다. 혼자서 여의도까지 걸을까 하다가 새해 인사도 나누고 얼굴도 보려고 진경이랑 걸었다. 올림픽대교 아래 한강변에서 시작해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 뚝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올림픽대교를 지나 반대로 정보도서관까지 갔다 오는 9km 정도의 거리를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나누며 함께 했다. 예비 고3 엄마인 진경이의 무용담에 가까운 일상은 거의 전쟁 수준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남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나의 일상은 풍류에 가깝다. 진경이 삶의 치열함에 문득 부끄러워진다.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공부하는 삼학년 반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호승 시인의 '술 한 잔'을 소개하자 누군가가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는 안치환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인생은 나에게 한 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가 함축적 의미라며 삶은 불공평하다고 친절하게 해석을 한다. 삶은 공평하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녀석에게 자비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내 노력만큼은 돌려주기를 원했는데, 그 녀석은 때때로 내 노력을 블랙홀처럼 삼키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땠다. 이렇게 주석을 들이대고 싶었지만 나는 접장이다. 삶이 공평하지 않다는 근거를 대라는 나에게, 옆에 친구를 가리키며 자기와 똑같은 인간인데 자신보다 못생겼고 엄마가 개 잡듯이 잡는다며 재수 없는 인생이라며 헤헤거린다. 같이 낄낄대고 싶었지만 점잖게 결론 내렸다. 하느님은 한 쪽 문을 닫으시면 다른 쪽 문을 열어 놓으신단다. 단지 우리가 그 열린 문을 보지 못할 뿐인 것을!
유쾌하게 서로의 일상을 펼쳐 보이다가 각자의 전쟁터로 돌아온다. 무용담이든 풍류담이든 일상의삶이 주는 경건함에 머리를 조아리며 외경심에 사로잡히는 2009년 새해의 둘째 날이다.
술 한잔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성탄절 다음 날 설악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