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기

관악산 소박한 걷기

꿈꾸는 식물 2014. 3. 4. 10:37

  삼목회 이후 급격히 몸과 마음이 가라 앉아 동적인 일을 삼갔다.

금요일에는 영화관에서 혼자 '노예 12'를 보고 밤에는 예당에서 열리는 KBS 교향악단 콘서트에 이수회 여러분들과 다녀 왔다.

토요일에는 주선씨 운동 가고 종일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은희경의 '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와 서영은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에 빠져 방콕을 하였다.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러보낼 수 있어.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꿈만이 가까스로 그 뿌리를 지탱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건 아닐 테지.   

   뿌리를 잘 내리고 싶다면 가벼워져야 해요. 물에 떠있는 바이올렛 잎처럼.

 

매혹적인 언어의 연금술사 은희경의 문장에 빠져 한참 읽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서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 개운하지 않는 몸으로 춘천을 가겠다는 원대한 계획으로 나섰지만 출발 시간이 늦어 주선씨표 왔다리갔다리를 하다가 결국 차를 두고 지하철로 사당으로 이동하여 관악산에 들었다. 

원래 계획은 사당에서 연주대 찍고 팔봉능선 지나 무너미고개에서 호수공원 거쳐 서울대 정문으로 하산하려고 했는데, 늘 우리네 삶이 '계획은 원대하게 실천은 소박하게' 가 아니었던가?

팔봉능선에서 무너미고개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알아 보겠다는 저의 있는 야심은 결국 불발탄으로 끝나고, 연주대 지나 과천 향교로 내려와서 과천정부 종합청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3월 2일 일요일, 5시간 10km)

   사당역 6번 출구에서 나와 많은 산꾼들을 따라 나선 것이 전에 주선씨랑 다녔던 까치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이 아니라 지난 번에 삼목회에서 탐방했던 관음사 능선이 되고 말았다.

초장부터 힘들어서 자꾸 뒤로 쳐지는 주선씨에게는 무리한 출발이었지만, 산악회를 따라온 초보 산꾼들이 많아 주선씨의 완보와 뒤쳐짐이 그렇게 돋보이지 않아서 한편 다행스럽기도 했다.

연주대 주능선까지 가는 길의 두 개의 국기봉에는 수많은 주말 산꾼들이 포진하고 있어 나란히 나란히 기차놀이를 하며 줄지어 걸어간다.

봄이 열리는 3월 첫 주말이어서이지 곳곳에 시산제를 올리는 산악회가 많아 윗부분을 살짝 돌려 깎은 온갖 과일에 통으로 올린 북어포며 시루떡에 웃는 돼지머리까지 놓인 고사상을 만날 수도 있었고, 자꾸 쳐지는 신입 회원의 팔을 끌고 때로 엉덩이를 밀어 올리며 바위를 기어 오르기 위하여 다른 회원들이 잠시 맡긴 대여섯개의 스틱까지 들고 고군분투하는 산악회 대장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줄지어 걸어가는 주말 산님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사람의 초보 산꾼으로 인한 교통 체증은 심각한 수준이지만 오랜만에 시리도록 투명하게 활짝 갠 하늘을 볼 수 있고, 멀리 북한산과 가운데 동네 뒷산같은 나지막한 남산과 푸르게 흘러가는 기적같은 한강과 이름 부를 수 있는 한강 교각을 뚜렷하게 헤아릴 수 있는 행복은 저자거리의 혼란스러움을 만회하고 남는다.

앞으로 걸어가서 주선씨 기다리고, 주선씨가 다가오면 다시 앞장 서서 걸어가고, 바람막이 자켓도 벗지 않는 주선씨는 스미트폰의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고 디카를 꺼내지도 않고 쉬었다면 물을 한바탕 마시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자신의 몸을 끌고 관악산과 처절한 전투 중이다.

골프가 없는 주말에는 가능한 함께 산에 와야겠다고, 운전을 오래 오래 하는 먼 산이 아니라 서울 근교의 산에 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결국 연주대 근처 천문대 아래에서 과일과 커피로 원기를 회복한 듯 했지만 연주암을 거쳐 과천 향교로 하산을 결정한다.

KBS송신탑 옆으로 이어지는 팔봉능선과 멀리 보이는 삼성산과 호암산은 다음으로 미룬다.

과천향교로 이어지는 하산길에서 릿지를 연습하는 산꾼들을 보았다.

30m 정도의 바위에 선등자가 길을 만들고 그 뒤를 이어 오르고 내리는 연습을 하는 릿지꾼들을 부러워하며 한참을 바라 보았다.

부럽고 부러운데 선뜻 나설 용기가 없는, 무엇이든지 쉽게 결정하고 나섰다가 쉽게 돌아서기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 나섰던 길에서 엄청난 좌절감과 상실감 그리고 모멸감을 느끼고 돌아오는 길, 내가 무언가에 용기를 내는 것은 당분간 어려울 듯 하다.

 

  너무 가까워지면 '관계'가 개인을 삼키고, 너무 떨어지면 '거리'가 고립을 낳는다.

  그 둘 사이의 곡예술의 지난함.

 

나는 여전히 거리 조율에 서툴고 낯설며 관조적 삶이 어렵고 불가능하다.

KBS 송신소 앞  독특한 주인장이 있는 집에는 여러 그루의 태극기 나무에 수많은 태극기가 휘날리며 어제가 삼일절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가까워지기와 멀어지기,  관조와 방관, 천천히 걸으며 많은 것을 생각한 하루가 이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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