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기

겨울왕국(남한산성)

꿈꾸는 식물 2014. 2. 11. 09:04

  세밑부터 눈구경을 위해 태백산 등반을 계획하였지만 날씨가 도와 주지 않아 실천에 옮기지 못 하였다.

날이 너무 따뜻하여 주목에 눈이 남아 있지 않거나 날이 너무 추워 길을 나설 용기가 나지 않거나, 오늘도 강원도에 눈이 많이 내려 대설주의보에 눈폭탄에 떠들어대는 방송 때문에 또 태백행을 접어야만 했다.

주선씨 골프 연습장에 동행 했다가 그 근처 산에 오르기로 계획을 잡고 책 한 권 집어 들고 따라 나서는데, 연습장까지 가는 길이 겨울왕국 그 자체이다.

덕소를 조금 지난 가평 초입인 연습장까지 길은 도로에 눈은 대부분 치워졌지만 도로변 나지막한 산의 나무들이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쓰고 이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눈을 치울 수 없어서 연습장은 휴업이었고, 강원도의 유혹을 접고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가평과는 달리 나목의 눈이 바닥이 거의 보이는 가난한 집 뒤주의 쌀같아 그 초라한 볼품 없음에 마음이 언짢았다.

그러나 눈이 많은 곳이라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한산성은 설국을 연출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중앙 로터리 근처 주차장에 주차하고 눈길을 따라 남한산성 성곽을 돌기 위하여 북문을 향하여 오른다.(2월 9일 일요일, 3시간 40분 10km)

  북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길은 온통 겨울왕국이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으로 아이젠이 진흙길의 진흙을 한짐 끌고 가듯이 눈을 한짐 끌고 오는 바람에 가끔씩 가던 길을 멈추고 아이젠 사이에 잔뜩 끼어 있는 눈을 털어 주며 걸어야만 했지만, 아이젠 사이에 낀 눈뭉치만큼 마음은 산뜻하고 상큼하다.

남한산성을 돋보이게 하는 반듯하고 때로는 우아하게 S라인으로 몸을 구부린 소나무 위에 눈꽃은 어김없이 피어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겨울 나목의 가지 가지마다 부드러운 눈옷이 내려 앉고, 보수 작업으로 옛 맛을 조금 잃어 서운했던 성곽의 기와에도 소담하게 눈이 쌓여 쌍여서 운치를 더해 준다.

벌봉과 객산으로 나가는 암문에서 성밖으로 길게 흐르는 하남 위례길을 바라보며 지난 겨울 갑자기 쏟아지는 눈보라와 추위 때문에 점심도 먹지 못하고 남문으로 부랴부랴 하산했던 삼목회를 아득하게 떠올려 본다. 

많은 주말 산객들의 알록달록한 등산복들이 떼를 지어 줄을 맞추어 지나가고, 부부끼리 연인끼리 나지막한 따뜻한 목소리가 들리고, 비료 포대가 아닌 플라스틱 눈썰매에 아이를 태우고 눈길을 걸어가는 젊은 아빠들의 모습이 보인다.

지난 번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서도 플라스틱 썰매를 끄는 젊은 아빠들을 본 적이 있다.

언젠가 아니 이제 곧 젊은 아빠들의 무리에 합류해야만 할 아들을 떠올리면 공연히 마음이 벌써부터 심란해진다.

아들이 질머져야만 할 지난한 삶의 무게에 지레 겁을 먹는 나는 아들에게 아직도 깊게 매혹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을 떠올리면 늘 언제나 깊은 슬픔을 느끼는 나는 단언컨대 아들 바보이다.  

  주선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경사에서 동문을 지나 길을 건너 남문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른다.

동문에서 남문으로 향하는 성곽길은 예전에 성곽 밖을 걸을 때 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포기해 버렸는데, 이제 보니 사이사이에 암문을 제대로 만들고 열어 두어서 언젠가 성곽 밖으로 걸어봐야겠다는 야심(?)을 갖게 만든다.

남문과 서문을 거쳐 북문을 찍고 동문 일부까지 성곽 밖으로 노란 감국을 바라보며 걸었던 매혹적인 가을날이 떠오른다.   

동문에서 남문으로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 지나온 성곽이 길게 보이고, 멀리 성남 검단산과 망덕산, 이배재고개 지난 영장산, 태재고개 지나 못 가본 불곡산까지 연봉들이 물결치듯 흘러 내려 힘들지만 내가 좋아하는 남한산성 길 가운데 하나이다. 

주선씨랑 산에 가면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약점에도 색다른 등산로를 시도해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오늘은 성곽길이 아닌 성곽 아래 능선길을 여러 번 시도해 보며 걸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남문에서 서문까지 능선길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길은 부드럽게 위 아래로 이어지며 물결을 치듯 흐르며 이어진다.

언젠가 따뜻해지면 이 소나무 숲에 돗자리 깔고 하루를 보내자고 주선씨는 부도수표를 한 장 발행한다.

글쎄, 올해는 주말까지 바쁠테니 언젠가가 은퇴 후면이리라 가능하겠지 혼자 생각하며 웃는다. 

점령군처럼 눈이 온통 차지한 남문의 성루며 주변 풍경은 산객들이 많음에도 고즈넉하고 호젓하며 쓸쓸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소담스럽게 눈이 내렸는데 아들은 오늘 무엇을 할까?

오늘 내 화두는 아들이다.

그리고 당분간 이 화두는 정당하다.

 

 

 

 

 

 

 

 

 

 

 

 

 

 

 

 

 

 

 

 

 

 

 

 

 

 

 

 

 

 

 

 

 

 

 

 

       

 

 

               

'걷고 또 걷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단산  (0) 2014.03.11
관악산 소박한 걷기  (0) 2014.03.04
불곡산  (0) 2014.01.20
제주 올레길(1구간 - 2구간)  (0) 2013.05.21
한라산 등반(2) : 돈내코에서  (0) 2013.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