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망우리 공원 묘지에서

꿈꾸는 식물 2009. 2. 11. 01:08

  집에서 가까운 곳이기에 아차산과 용마산을 그렇게 많이 다녔지만 망우리는 처음이다.  망우리 공동 묘지라는 느낌 때문에 외경심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공동 묘지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망우리는 정답게 내게 다가왔다.

 

  시인 한용운과 박인환 그리고 소설가 계용묵, 방정환선생과 화가 이중섭, 독립운동가 오세창과 조봉암.  그들의 유택인 망우리 공원을 돌아보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에 빠지다.  묘지 사이사이로 난 길을 거닐며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 묘지 사이사이에 있는 체육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 사람들을 보며 저승과 이승이 백지장 한 장 차이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떠올린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 정답게 다가온다.

 

  '목마와 숙녀'의 시비가 서있는 곳에서도 우리는 박인환의 묘를 찾지 못했다.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라는 그 구절은 너무 알려져 상투적이라는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 1926년에서 1956년까지라는 생몰 연대가 주는 애잔함이 마음에 절이다.  '세월이 가면' 가버리는 것은 사랑이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정말 옛날밖에 없을까?  

   

  세월이 가면

                                                    박 인 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언니가 사다 꽂아 놓은 시집에서 처음으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보았을 때의 마음의 울림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라는 시구가 주는 근거 없는 막막함이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해야 한다'는 20대의 근거 있는 절망으로 바뀐 때의 시린 마음이 지금도 나를 쓸쓸하게 한다.  그 쓸쓸함을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디카 누르기에 바쁘다.

 

목마와 숙녀

                          박 인 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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