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일기

서울 도심 등산로를 따라

꿈꾸는 식물 2012. 1. 5. 19:56

  지난 봄에 연이어 두 번 걸었던 서울 도심등산로에 나서다.

연일 최저 기온이라는 언론의 호들갑에  망설이다가 길을 나섰다.

간단히 동네 한 바퀴 돌겠다는 생각으로 커피병도 담지 않고 빈 베낭을 메고 나섰는데, 뜻밖에도 날씨가 부드럽고 순하다.

생각을 바꿔 올림픽대교에서 시작, 서울 숲 지나, 응봉산 거쳐, 독서당공원 찍고, 금호산, 매봉산을 지나, 버티고개를 넘어, 반얀 트리 서울 스파와 신라호텔 안쪽 서울 성곽 지나 광희문 보며, 동대문까지 걸었다.

마이코치에 따르면 4시간 동안 19km를 걸었단다.(1월 5일 목요일)

  어느 해 여름 도심 등산로를 걷겠다고 나섰다가 죽도록 비만 맞고 돌아왔고, 그 다음 해 봄 혼자 걸어내고, 우리 땅 도반님들과 함께 걸었었다.

힘이 넘쳐 남산 지나 청계천 거쳐 송정동 둑방길 찍고, 군자교에서 헤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산산님과 장정애님, 그리고 이혜리님이 함께 걸었을 것이다.

남산에서 왕돈가스를 먹고, 광장시장에서 커다란 빈대떡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약간 얼어붙은 한강에는 겨울 햇볕이 쏟아져 부서지고, 겨울 철새들이 얼음 위에 모여 모여 앉아 해바리기를 한다.

바이커도 워커도 드문 뚝섬 시민 공원의 오리배들이 다가올 봄을 꿈꾸고 있다.

서울 숲의 꽃사슴 가족들은 얼어버린 연못에 아랑곳하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따사로운 겨울 햇볕을 쪼이며 그대로 풍광이 되어 있다.

응봉산의 그 노란 개나리들도 앙상한 가지 속에 노오란 꿈을 숨기고 이 겨울을 견뎌내고 있다.

버티고개에는 남소문인 광희문 원래 터가 외롭게 그 세월을 참아내고 있다.  

  금호산에서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생태 육교를 지나며  전에도 생각했던 시간 여행에 나선다.

1986년 5월 25일 주선씨와 결혼하고 상경하여 신혼살림을 시작한 곳이 옥수동이었다.

약국을 하는 동생과 더불어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동생 약국에 가까운 옥수동에 집을 구했다.

그 곳에서 승민이가 태어났고, 걸음마를 했고, 말을 배웠으며, 1989년 2월 세 살짜리 승민이와 옥수동을 떠나 강 건너 잠원동으로 이사를 했다.

생태 육교를 내려가니 그 당시 81-1번 버스 종점이다.

버스 종점 뒤로는 아파트가, 동생 약국 자리는 간판 흔적만 있고 식당으로, 독일 빵집 자리부터 또 새로운 아파트가 건축 중이다.

우리 집을 찾지 못하고 실망하여 다시 도심 등산로로 올라 서는데, 눈에 익은 우리 집이 보인다.

우리가 살았던 일층은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빈 집'이어서 현관 유리가 깨진 것을 제외하고는 지훈이네 집 문도 지하 보일러실도 여전하다.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우리가 살았던 방을 보고 싶었는데, 빈 집이어서 도저히 현관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십대의 푸르렀던 주선씨와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장아장 걸었던 해맑았던 아들 승민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타님 말대로 안드로메다에 있을까?

아마 레빗 홀을 타고 다른 우주 공간에서 다른 버전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길에서 만낫던 '빈 집'과는 다른 의미로 '빈 집'이 되어 재건축을 기다리는 그 집 앞을 나는 오랫동안 서성거렸다.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걷기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네 한 바퀴 돌기  (0) 2012.01.14
걸어서 올림픽 공원까지  (0) 2012.01.12
여의도 샛강끼지  (0) 2011.12.01
서울 성곽  (0) 2011.11.27
혼자서 동네 한 바퀴  (0) 2011.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