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사블랑카
추억의 명화 카사블랑카를 보며 카사블랑카를 떠난다.
모두가 미쳐가는 이 수상한 시대에 셋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기에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 릭의 뒷모습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렇게 익어 가는 끝없이 이어지는 황금빛 밀밭, 방목되어지는 헐벗은 메마른 양의 무리, 목동 뒤를 따라 떼지어 이동하는 양의 무리, 우거진 유칼립스 나무, 껍질을 벗긴 채 뻘건 상처를 드러내는 코르크 나무, 푸르른 밀밭과 황금빛 밀밭 사이에 피어 있는 붉은 양귀비, 일년생으로 낮게 깔린 포도나무, 이름도 짐작할 수 없는 우리네 그것보다 한결 진하고 큼직한 송이송이 꽃송이.
낯선 풍광 속으로 릭이 추구했던 사랑의 미덕이 낯설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자신은 온전히 추억만을 간직하는 릭의 사랑법.
그가 행했던 사랑의 가치가 낯설어 낯가림할 만큼 우리는 멀리 왔는가?
한때 사랑이 지고지순의 가치였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나에게도 있었다'는 과거형의 문장이 아프게 눈에 들어 온다.
그러나 그 사랑 역시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얼마나 많은 아픔을 수업료로 지불했는가?
어쩌면 릭 역시 많은 수업료를 지불했기에 기꺼이 그녀를 떠나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개 낀 공항 활주로의 이별 장면은 여전히 사랑이 최고의 가치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2. 색채의 향연, 신의 식탁보
모로코의 산야는 신의 거대한 식탁보이다.
누렇게 익은 황금빛 밀밭, 이제 방금 경작한 선명한 붉은 빛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밭, 파랗게 자라 올라온 초록빛 감자밭, 사이사이 완충 지대 역할을 하는 야생화 꽃밭이 만들어 내는 신의 조각보이다.
능소화 같은 붉은 빛 꽃은 긴 꽃술을 뽐내고, 영춘화 내지는 개나리 같은 울타리 꽃들은 노란빛을 반짝반짝 쏟아낸다.
우리네 엉겅퀴보다 훨씬 크고 진해서 무섬증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보랏빛 꽃밭, 우리네 마가렛보다 훨신 크고 진한 온통 하얀 마가렛 꽃밭, 끝내 가까이 보지 못한 보랏빛 비밀의 꽃밭이 신의 신탁보의 화룡점정.
이제 방금 갈아 엎어 놓은 붉은 빛의 흙도 연한 붉은 빛에서 시작하여 채도를 점점 높혀 가며 색의 향연을 펼쳐 놓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지막한 고원지대의 평야는 모로코가 신의 축복임을 웅변으로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