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기

치명적 유혹

꿈꾸는 식물 2009. 4. 30. 12:21

  부석사 무량수전에 기대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선 지난 가을 어느 날의 출분(?)이 나에게는 이십 년 넘은 결혼 생활 동안 최초의 남편 없는 외박이었다.  연이어 대관령 옛길에 혹해 관동대로에 나섰고, 이제 낙동강이다.  풍문으로만 듣던 낙동강이 드디어 그 속살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말하기 시작했다.  홀로 흘러 흘러서 절로 깊어지고 넓어져 끝내  바다에 도달하는 저 강물처럼, 나도 홀로 흘러 깊어지고 넓어져 마침내 바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내 바다는 어디일까? 지난 일구간에 나를 사로잡은 화두에 답을 찾지도 못했는데, 강변에 피어있는 수많은 꽃들이 새로운 화두가되어 또 다가온다.  누가 보아 주지 않아도 저 꽃처럼 열심으로 뿌리 내리고 온 몸으로 꽃 피우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누가 나를 보아 주지 않는다고 엄살 부리지는 않는가?  엄살 부리고 이리광을 할 만큼 내 삶을 치열하고 진지하게 살고 있는지 대답 하라며 꽃들이 아우성이다.    

 

 

 

 

 

 

 

 

 

 

 

 

 

  공자가 말한  군자의 삼락(三樂) 가운데  ' 뜻을 같이 하는 친한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 가 있다.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나는 소식 없이 찾아오는 벗은 호환(虎患)  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는 동물일수록 저급한 영혼을 가졌다는 남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내 영역을 주장하며 그것을 증명해 내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그래서 나는 불치병인 증상이 독특한 이른바 나름 '공주병' 환자이다.  물론 나의 아버지 성함이 '김공주(金公朱)씨이기 때문에, 나는 왕족이라며 나를 변명한다. 모르는 사람들을 따라서 혼자 나서는 길이 참 힘들고 낯설다. 밤에 나이 든 특권인 양 야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아침에 또 다시 복습하는 님을 참아내기가 힘들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분위기도 잘 모르는 내게 얻어 먹지만 말고 사보라고 말하는 님이 낯설고, 세면장에서 실수로 샤워기로 물세레를 주고 "별로 젖지 않았지요?" 라고 묻는 님이 짜증이 난다.  그럼에도 나는 유혹에 빠져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번 낙동강 기행에서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서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차로 이동할 때마다 보조 의자를 챙기고, 피곤하고 지친 돌아오는 길에도 먼저 내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단잠에서 덜 깬 눈을 크게 뜨며 얼굴 가득 웃어주는 그대가 있었다.  퇴계 오솔길 전망대를 향한 마지막 오르막 길에서 지친 길벗을 부축하며 '아자아자'를 외치는 그대를 보았다.  늘 좋은 그림을 위해 앞으로 뒤로,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그대도 있었다.  길 없는 길을 헤쳐 나가면서도, 뒤에 오는 길벗을 위해 꽁꽁 얼린 얼음물병을 준비하는 그대를 보았다.  제대로 걷지 못해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면서도 어느 틈에 도착해 작은 물병을 건네는 큰 마음의 그대를 발견했다. 사단법인 두릅대도협회 장물 괸리인을 자처하시며 두릅 주머니를 묵묵히 메고 가는 그대를 보는 것도 기쁨이었다.  승부터널을 지나며 느껴 보았던 님의 막막한 마음을 강 속에 몸을 담그며 느껴 보고 싶었는데, 온갖 산나물 - 싱아, 찔레, 두릅 -을 거둬 먹이기에 바쁘셔서 기꺼이 도선생이 되신 대도(大盜) 선생님도 마음으로 다가온다.     

 

 

 

 

 

 

 

 

 

 

 

          

  심한 낯가림에 대한 고해성사 같은 글을 쓰고도 다음 기행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성큼성큼 다가갈 자신은 아직 없다. 고해성사 뒤에 성모송 다섯 번 낭송하고도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나약한 우리가 아닌가?  하나 조금씩 조금씩 낯가림에 익숙해져 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리라 기대한다. 그만큼 낙동강과 그 강을 걷는 사람들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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