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공룡능선에 오르는 날, 대청봉 일출을 보기 위한 몇 팀이 나가고 새벽 4시 드디어 우리 알람이 울린다. 공룡능선을 오르지 않을 분들은 새벽 시간이 조금 여유로울 듯하다. 지난 밤 식사를 끝내자마자 꿈나라에 들었던 미자씨가 이제 유체이탈을 마치고 돌아왔다. 예전 같으면 일찍 잠에 빠졌다가 다음 날 새벽이면 잽싸게 일어 나셨는데 이런저런 일로 몸과 마음이 심하게 지치셨던 듯 깨울 때까지 일어나시질 못했다. 그래도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우리들 마음까지 화안하게 밝아진다. 지난 밤 내린 이슬 때문에 전망대 식탁을 버리고 실내에서 아침을 준비하며 우리가 가야할 공룡능선에 눈을 떼지 못한다. 어제보다 더욱 가깝고 선명하게 다가와 마음에 닿는 설악의 연봉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식전 사과에 누릉지를 먹고 식후 커피까지 마시고 6시 10분 드디어 출발이다.
소청대피소 - 희운각대피소 : 50분 ~ 1시간 10분 (7시 20분 도착, 7시 30분 출발 )
희운각대피소 - 마등령 삼거리 : 4시간 10분 ~ 4시간 50분 (12시 20분 도착, 12시 50분 출발 )
마등령 삼거리 - 비선대 : 2시간 ~ 2시간 40분 ( 3시 30분 도착 )
비선대 - 소공원 : 30분
소청대피소에서 소청을 향하여 어제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오른다. 나뭇잎에 스치면 쏟아지는 이슬 이슬 방울, 등산화를 적시는 풀잎 이슬 이슬 방울, 어젯밤 부지런한 거미가 만들어 놓은 거미줄이 어지럽게 걸린다. 언젠가 우리 땅에서 일찍 길을 나선 날, 몸피가 작은 내가 앞서는 바람에 뒤 따르던 몸집이 큰 타이슨님께 확실하게 거미줄 제거하라는 야유 겸 놀림을 받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고 그래서 각자의 입장과 처지가 달라져도 함께 했던 그 시간의 기억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목재 계단을 오르면서도 초여름 햇발에 찬연하게 빛나는 설악의 연봉에 눈을 떼지 못한다. 힘들게 700m를 올라 중청대피소와 희운각 소청대피소로 나뉘는 삼거리에서 바람막이를 벗는다. 8시간의 숙면으로 재부팅된 미자씨,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져서 용불용설을 증명하는 머핀님과 함께 희운각을 향하여 난 숲길을 걸어 내려간다. 상큼하고 투명한 초여름 새벽의 공기, 아직 사나움을 탑재하지 않은 초여름 새벽의 부드러운 햇발, 새소리와 깊은 산 특유의 산내음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걷는다. 산산님과 처음 찾았던 희운각 대피소에서 물을 채우고 서로를 격려하며 천불동 계곡을 버리고 공룡능선으로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진입한다,
힘들어서 "아~~" 아름다워서 "아~~"를 4시간 30분 동안 외친다는 공룡능선, 난이도가 최상이어서 산행 표준 속도를 시간당 2km가 아닌 1km로 정해 놓은 공룡능선. 지난 2011년 가을 산산님을 따라 화대종주를 처음 걷고, 연이어 늦가을 봉정암에서 1박하고 공룡능선을 처음 걸었는데, 벌써 3년 전이다. 무작정 따라 나선 길이었고 설악산에 대한 사전 정보도 전혀 없었기에 힘든 줄도 몰랐고 아름다움에 찬탄할 줄도 몰랐다. 단풍철이 끝나고 모든 것을 다 떨군 나목의 계절 11월도 아닌 시월 마지막 주 설악이기에 밋밋하게 그냥 씩씩하게 걷기만 했을까? 감동도 없이, 찬탄도 없이. 이렇게 아름다운 공룡능선을 이렇게 가깝게 두고 4년 가까이 만나러 오지 않다니......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눈앞에 파노라마 같이 펼쳐진다. 온갖 기암괴석들에 연두빛과 초록빛과 짙은 녹음까지 띤 소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전날 내린 비 덕택에 깨끗해진 대기에 하이얀 구름들이 아래부터 뭉게뭉게 피어 오르며 여기저기 봉우리 하나하나를 휘감아 돌고 있다.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돌리면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곰처럼 보였다가 고릴라처럼 보이는, 어필봉처럼 보였다가 바오밥나무처럼 보이는, 칠봉인가 팔봉인가 다시 세어 보고...... 하얀 구름이 아래에서 살금살금 낮은 포복으로 진격해 오는데 가야할 길이 많은 우리는 마냥 넋을 놓고 즐길 수만은 없기에 아쉬움은 가득 하다. 커다란 기암괴석을 만나면 돌아 돌아서 나아가야만 하기에 업다운 업다운을 반복 또 반복해야만 한다. 아래로 다운은 끝이 없고 꼭 그만큼 바로 위로 업을 해야만 한다. 국립공원 난이도 "매우 어려움"의 진수를 보여 준다. 쇠기둥과 쇠줄은 기본이고, 양쪽으로 쇠기둥을 잡고 "유격!"을 외치며 오르고 내려야만 할 정도의 길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고온 능선과 다가올 능선의 다채롭고 기묘한 아름다움에 경탄과 감탄과 탄성을 숨길 수 없다. 모든 것을 받아주며 토닥토닥 안아 주는 정겹고 살가운 부드러운 어머니 산 지리산, 차갑고 분명하며 논리적이고 역동적인 이성의 산 설악산. 몸과 마음이 허락한다면 틈틈이 설악에 들고 싶다. 주선씨가 조금 더 힘과 근성을 길러 등산 근력이 생긴다면 꼬옥 함께 설악에 들고 싶다.
마등령 삼거리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비선대로 향한다. 1km 정도에서 모두 만나 사진을 찍고 각개 전투로 하산한다. 우리 삼목회 특징인 따로 또 같이 산행이다. 안개가 자욱하게 밀려오는 숲길을 각자 자기 걸음으로 걸어 걸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다. 안개는 게릴라처럼 스물스물 파고 들어 울산바위와 권금성을 보려는 우리 기대는 그렇게 사라진다. 주선씨와 소공원에서 금강굴까지 오른 기억을 떠올려 본다. 금강굴에서 만난 스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나? 아님 있나? 금강굴 지나 물소리 우렁찬 비선대에서 일행을 기다린다. 땀이 식으니 갑자기 밀려오는 한기에 등이 선뜻선뜻하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께서 건내 주신 커피 한 잔에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다. 산에서 만나는 고마운 분들의 마음이 다정하고 정겹다. 머핀님 기다리다가 살짝 마중을 나간다. 작은 고갯길 올라 한참 기다리니 머핀님의 작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쉰 몇 해 전 오늘 이 세상에 초대 받아온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선대에서 소공원까지 평지는 오롯이 머핀님 세상이다. 혼자 달리고 발 담그고, 속초 시내까지 도저히 가지 못하겠다며 소공원에서의 식사를 제안하고, 주문하고 계산하고, 바쁘고 바쁘다. 파전과 도토리묵 무침에 맥주를 나누며 1박 2일 산행을 마무리 한다. 속초 고속버스터미널까지는 25분, 시외바스터미널까지는 4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한다. 고속버스는 차표가 없어 모두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동서울로 향한다.
모두들 종아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럼에도 모두들 씩씩하게 가게에 나가 일을 하고,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며 일상으로 무사 귀환했다.
"언제 또 설악에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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