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 동안 기다리던 태백산 눈꽃 등반에 나선다.
눈이 조금밖에 내리지 않아서, 갑자기 혹한의 추위가 몰아와서, 날이 지나치게 따뜻하여 눈을 볼 수 없을 듯 싶어서, 심지어는 받아 놓은 날에 늦잠을 자서 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길을 떠날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 5시 40분에 일어났는데 어제 베낭까지 다 챙겼음에도 나서기 싫어서 머뭇거리다가 주선씨의 결단으로 빛의 속도로 베낭을 챙겨 6시 50분 드디어 태백을 향하여 장도에 나섰다.
당골 석탄박물관에서 진경이네를 만나 2009년과 유일사에서 올라 유일사로 하산한 2012년에 이어 세번째 태백산 눈꽃 기행이다.
영동지방에는 눈폭탄이 쏟아졌다는데 태백까지 가는 길은 지나치게 깔끔하고 주변의 산에는 서울 근교에서 볼 수 있을 덩도의 설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눈이 없으면 바로 차를 돌려 선자령으로 가자는 주선씨의 걱정은 단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등반 도중에도 계속 눈이 내렸던 두번째 기행보다는 는이 덜 내렸지만 심한 겨울 가뭄으로 눈꽃 축제가 취소 되었던 첫번째 기행보다 훨씬 많은 눈꽃을 만날 수 있었다.
약 8.4km 거리를 10시에 오르기 시작하여 점심 시간까지 포함하여 약 네 시간 걸어 2시 10분 당골 주차장에 도착, 택시로 유일사 매표소로 이동하여 2시 50분 서울로 출발하여 오후 6시 집에 도착하였다.
왕복 여섯 시간 운전한 주선씨 덕분에 BMW족인 내가 럭셔리 우아한 귀부인이 되어 편안한 눈꽃 기행을 할 수 있었다.
10시가 조금 되지 않은 유일사 매표소는 대부분 단체 산객들의 세상이었다.
소수 정예로 태백산에 오는 산꾼들도 있었지만 산악회 안내 등반 내지는 눈꽃 구경을 나선 관광객들이 많아 최첨단 무기를 지닌 오합지졸의 병사들의 무리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안전을 위해 아이젠과 스틱을 장착한 것까지는 칭찬거리지만 어제 구입해서 태그도 떼지 않았을 듯 싶은 스패치는 물론이고 영상 가까운 기온에 두터운 다운파카와 털이 복실복실 잔뜩 달린 털모자에 고어텍스 장갑과 핫팩까지 장착하고 MBC나 ABC를 막 떠날 복장이었다.
그러니 조그마한 경사에도 땀을 비오듯 흘리며 뒤로 쳐지고, 뒤로 쳐질수록 입은 살아서 목소리는 커져 저자거리를 방불케 하는 태백산이 되고 말았다.
지난 주 남한산성 눈길을 걸었던 덕분인지 오합지졸 가운데 주선씨의 걸음이 돋보였다.
사진도 찍고 잘 잡히지 않고 쉽게 빠져 버리는 스마트폰 이어폰 때문에 해찰한 것을 빼고는 나름 훌륭한 걸음이었다.
라면 끓이는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풍겨오며 주목 군락지를 예고한다. 4.4km니 2시간 정도 오른 듯 싶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주목은 때로는 살아서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때로는 죽어서 앙상한 하얀 가지를 그대로 드러내며 나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객들을 피해서 주목 군락지 안으로 들어가니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주목들이 새삼 내 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함백산이 꿈결같이 아름답고 부드러워 마음까지 아련해진다.
'장군봉'이라는 표지석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천제단도 크게 새롭게 만들어진 듯 싶다.
그럼에도 태백산에 드는 탐방객들의 몰상식 내지는 어이상실은 더욱 진화된 듯 느껴진다.
사진은 온통 다른 탐방객들로 가득하고, 아마 다른 사람들의 사진에도 내 모습이 가득하겠지.
천제단에서 당골 주차장까지 하산길은 완전 봅슬레이 경기장처럼 반질반질한 눈길이 얼음판처럼 반짝반짝 겨울 햇빛을 받으며 아래로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젠을 차고 지그재그로 뛰어 내려 가다가 잠시 멈춰 주선씨를 기다리고, 주선씨가 시야에 들어오면 또 다람쥐처럼 눈길을 뛰어가는 즐거움과 가벼움을 무엇에 비유할지 한참을 궁리해도 잘 모르겠다.
존재의 가벼움 내지는 삶이 반짝 빛나는 눈 깜짝할 정도의 찰나.
영혼이 은화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투명해지는 느낌, 회의주의자의 선병질적인 영혼이 근육질의 영혼으로 다시 탄생하는 느낌이 이럴까?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만 온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태백산에서 하산길은 축제였다.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지나가지 않는 바다.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세월은-
아직 오지 않은 세월.
그대에게 내 말하고 싶은
아름다운 중에서도 아름다운 말은-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은 말.
-나짐 히크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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