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날씨가 포근했음에도 귀찮이즘과 게으름이 도져서 최인호 유고집 '눈물'을 읽고, 오후에는 '시절인연'과 '플랜맨'을 강변 CGV에서 연속 상영으로 보았다.
대학 동아리인 모닥불 신년회에도 가지 않았으니 귀찮이즘의 정도가 중증은 넘을 듯 싶다.
주선씨는 거래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고, 승민이는 학교에 간다며 토요일인데도 세 사람 모두 각개 전투이다.
결국 나는 주선씨가 집을 비우는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시간을 칼같이 이용해 동네 걷기에 나섰다.
아차산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장 동쪽 끝인 워커힐 진입로 직전에서 아차산에 들어가 대성암을 거쳐 아차산 정상을 찍고 용마산 거쳐 망우산으로 방향을 잡아 망우산 구석구석을 누비는 구리 둘레길을 따라 엄마 약수터로 하산하여 교문 사거리에서 걷기를 마무리한다.(1월 11일 토요일, 2시간 10km)
포근한 날씨 덕분인지 광진구 구민 전체가 아차산에 몰린 듯 아차산 등산로에는 사람 반 개 반으로 줄을 지어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야만 했다.
꾀가 난 반려견들이 온갖 해찰을 하고, 주중에 온갖 학원으로 끌려 다닌 아이들은 모처럼 토요일 산으로 끌려와 더 이상 걷지 않겠다며 떼를 쓰고, 반려견과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로 온 산이 저자 거리를 방불케 한다.
대성암 위에 넓적 바위에는 완전 기어가는 초보 산꾼들과 사진 촬영하는 관광객들로 교통 체증이다.
아차산을 지나 용마산으로 향하는 목재 데크에 이르면 조금 정리가 되고 망우산으로 향하는 길은 대부분 오르는 등산객만 보일 뿐 하산하는 산꾼들은 별로 없어서 길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어제 아침 떡집에서, 오후에 영화관에서, 오늘 다시 아차산에서 선배 언니 부부를 우연히 만나니 반갑고 정겹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이십 년 가까이 살았어도 약속하지 않으면 한번도 우연히 만난 적이 없었는데......
나뭇잎을 모두 떨군 나목 덕분에 구리 암사대교와 강동대교 미사대교 팔당대교로 이어지는 한강이 그림처럼 보이고, 한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산과 예봉산이 눈에 들어온다.
반대쪽으로는 멀리 북한산의 세 봉우리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 흐릿하나 정답게 마음에 닿고, 도봉산의 연봉이 나란히 펼쳐진다.
470 계단을 지나 드디어 망우리 공원 묘지인 망우산으로 들어 간다.
정갈하게 잎을 다 떨군 겨울 나무들 사이로 정결한 유택이 고요하고, 떠난 자들의 유택 사이사이로 남겨진 자들의 길이 이어지고, 어떤 유택은 아직도 잔설을 이고 있고, 대부분 유택들은 지난 계절 살벌하고 치열했던 온갖 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말라 시들어 버린 누런 풀빛에 침잠하고 있다.
보랏빛 제비꽃에 흰빛 제비꽃과 연보랏빛 할미꽃을 머리 가득 화관처럼 쓰고 있던 유택, 하이얀 분홍빛 꽃비를 내리던 벚꽃의 화려한 기억, 어머니 마른 손같은 조팝꽃으로 둘러 싸여 있던 아름다운 유택, 유택 옆의 그 진한 엉겅퀴꽃, 하트를 그려 놓은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던 유택을 떠올린다.
떠난 자의 유택 사이로 남겨진 자들이 서로 스치며 다가 왔다가 멀어지며 지나 간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공간에 약속도 없이 만났는데 눈길 한번 서로 주고 받지 않고 그렇게 스치고 지나 간다.
생몰 연대에 '오신 날' '가신 날'이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 온다.
어느 곳에서인지 모르지만 이 세상으로 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곳으로 가신 것이리라.
우리의 궁극이 죽음이라면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은 궁극에 이르는 변형이며 변주이리라.
언젠가 나도 돌아 가리라, 왔던 그 곳으로.
외로움에 젖어 마음이 풀기 가신 갈잎처럼 버석댈 때 혼자 망우산에 와야만 한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어디론가 숨고 싶을 때, 모든 사람들이 돌아 앉았다고 느껴질 때 혼자 망우산에 와야만 한다.
언젠가 나도 돌아 가리라, 왔던 그 곳으로, 이들처럼.
엄마 약수터 아래 배 과수원의 배나무들은 그 품위 있고 고결한 하이얀 꽃과 물기 머금은 상큼한 배의 추억을 안고 이 계절을 견디고 있다.
삶은 견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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