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일기

14문 종주

꿈꾸는 식물 2013. 6. 8. 03:21

  낮이 길어지면 14문 종주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시간 여유도 생기지 않고 점점 꾀가 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오늘 집을 나선다.

오늘도 주선씨가 새벽에 운동을 가서 일찍 나려고 했는데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며 꾸물거리다가 구파발역 1번 출구에 내리니 8시 20분이다.

여전히 휴일의 구파발은 주말 등산객으로 초만원을 이루고, 제대로 줄을 서지 못하여 허둥지둥 대다가 북한산성 입구까지 가는 휴일 특별 버스에 마지막으로 승차하여 북한산성 입구에서 9시에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목요일이어서 삼목회 산행을 해야 하는데, 머핀님과 미자씨는 팥빙수와 아이스커피 때문에 일손이 딸려 가게 걷기를 해야만 하고, 미영이는 서울 회의에 오는 남편을 혼자 둘 수 없어서 삼목회 산행이 취소 되었다.

몇 번 날을 잡았다가 미루고 또 미룬 14문 종주를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작 했는데,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결국 9시에 북한산성 버스 정류장에서시작하여 3시에 산성 입구 편의점에 도착, 6시간만에 17km 14문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6월 6일 목요일)

  지난 늦가을 11월 초에 혼자서 14문 종주를 하고 올해 들어 처음으로 길을 나선다.

꽁꽁 얼린 물 한통과 대저 토마토 두 개를 가방에 넣고 가벼운 가방만큼 마음도 가볍게 수문을 지나 대서문으로 향한다.

북한산 둘레길을 도는 초등학교 단체 탐방객들도 초입은 저자거리를 방불케 하고, 수문을 향한 길은 주말 등산객으로 줄을 서서 나란히 나란히 행진한다.

화재 발굴로 길이 변경되어 계속 계곡으로 가면 대서문을 놓칠 듯 싶어 계곡에서 다시 도로 쪽으로 방향을 돌려 대서문을 찍고, 지난 번 삼목회 때 대동문을 지나 오면서 함께 보았던 중성문을 다시 만나고, 되돌아 나와서 국녕사로 방향을 잡는다.

국녕사 확장 공사로 삼신각 뒷부분은 나무는 모두 베어지고 바위만 남아 있다.

그 커다란 부처님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무엇을 더 만들고 싶어서 또 산을 파헤치는지, 부처님께서 오시면 참으로 칭찬해 주시겠다.

드디어 가사당암문에 도착, 늘 가보지 않고 지나치는 의상봉을 한번 바라보고 의상능선에 접어든다.

용출봉 - 용혈봉 - 증취봉 - 나월봉 - 나한봉 - 715봉 -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을 쉬지 않고 걷는다.

부왕동암문과 청수동암문을 지나며 한번은 봉우리에서 너무 아래로 내려가 계곡까지 가고, 한번은 너무 올라가 길이 없는 곳까지 가서 다시 내려오는 반복되는 실수를 또 저지른다.

한번 한 실수를 계속 반복하면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는데, 나일봉과 나한봉 근처에서 어리석게도 꼭아래 계곡으로 내려간다.  

리찌를 하셨다는 어떤 여자 산꾼은 커다란 바위를 잽싸게 내려가시며 내려가는 것은 쉽다는데 여전히 나는 올라가는 것이 쉽다.

그 분이 내려간 길로 결국 나는 내려가지 못하고 다른 길로 조금 돌아서 내려왔다.

늘 겸손하게, 삶의 곳곳에서 만나는 상수(上手)들을 보며 오만한 마음을 다잡는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드디어 대남문에 도착하였다.

산성길로 붙으면 등산객들을 피할 수 있는데 산성길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고 그늘이 적어 더 힘이 든다.

뒤에서 쉬었다가 가자고 떼 쓰는 사람이 없어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해서 땀을 많이 흘린 듯 갈수록 힘이 들고 먹은 것이 전혀 없어 허기까지 밀려 온다.

대성문에서 한바탕 달디 달게 물을 마신다.  

물이 이렇게 달고 맛있기는 처음이다.

보국문과 대동문을 지나며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을 바라본다.

시야가 트이며 멀리 도봉산 자운봉과 오봉까지 들어온다.

아카시아 향기는 이제 사라지고그 뒤를 이어 싸리꽃 향기가 온 산에 가득하다.

산에서 만나는 산딸나무는 도심의 그것과는 달리 연두빛 잎 위에 피어난 하얀 꽃이 너무 앙징맞고 사랑스럽다.

동장대를 지나 용암문을 거쳐 노적봉을 바라보며 또 한바탕 물을 마신다.

머핀님이 제일 좋아하는 위문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다.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줄을 포기하고 위쪽 바위길을 걸으며 위문으로 향하는 목재데크에 도착, 줄을 지어 나란히 나란히 위문까지 올라 위문을 찍고 돌아온다.

이제 하산길, 대동사까지 힘들지만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내려온다.

지난 삼목회 때 미영이가 나눠준 쮸쮸바를 먹었던 그 바위를 바라보며 눈인사를 하고 드디어 대동사로 들어선다.

엄습해 오는 허기의 원인을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제대로 먹은 것이 거의 없다.

대동사 입구에 앉아 토마토를 먹으려는데 토마토가 너무 쓰고 쓰다.

토마토 먹기를 포기하고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마지막 원효 능선에 도전한다.

소박하고 단아한 북문이 생각보다 빨리 나를 맞아준다,

리찌를 하고 싶어하는 내 열망에 불을 지피는 염초봉을 오래 오래 한참 바라보며 원효봉을 떠난다.

본격적인 하산길, 원효암의 독경소리가 다정하게 들린다.

시구문을 지나 덕암사로 접어드는 계곡길을 지난다.

확장 공사로 어수선한 덕암사를 지나 산성 초입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수문의 흔적을 눈으로 그려본다.

  편의점에서 마시는 맥주 한 켄이 제대로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 당황스러워 조금 허둥댄다.

삼목회 때 여러 도반들이 내 질주 본능을 조절해 주었나 보다.

삼목회 때 여러 도반들이 내 허기를 잠재워 주었나 보다.

함께 걸었기에 걸음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었고, 함께 먹었기에 굶주림에 빠지지 않았던 것을 나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고,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삼목회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혼자서 구파발역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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