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내변산에서

꿈꾸는 식물 2008. 12. 29. 18:44

  내변산 직지폭포에서 내려오며 직지보를 본 적이 있는가?

내변산의 바위와 산은 내 마음을 흔들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빈약한 직지폭포에 마음 다쳐 내려 오는데 푸른 숲 사이로 흐르는 흰 빛을 발견했다. 이 한여름에 눈이 내린 것도 아닌데 비닐 하우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초록 숲 사이사이로 보이는 흰 빛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흰 빛의 정체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었다. 일몰을 한 시간 앞둔 하늘의 뭉게구름이 직소보에 비친 그림자가 여름 숲 사이로 하얗게 내게 보인 것이었다. 직소보로 내려와 보니 구름 그림자 자리는 하얗고 나머지 부분은 내변산의 우거진 숲 그림자로 초록빛이었다.

 

  헤르만 헷세에 심취했던, 심취라기보다는 헷세에게 도망치고 싶었던 여고 1학년, 아중리 저수지로 봄소풍을 갔을 때 아중리 저수지 주변 산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를 본 적이 있었다. 산에 비친 구름 그림자를 보며 모든 존재와 그 존재가 필연적으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그림자에 섬뜩한 무서움을 느꼈다. 빛과 그림자가 주는 그 필연이 감당하기 무서웠다. 그 필연이 삶의 무게처럼 느껴져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늘 언제나 나는 도망수였다. 도망수도 철저한 도망수가 아니라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만 지닌 채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 마음도 버리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그 어정쩡함이 오늘의 나라고 감히 정의 내린다. 나를 비우고 또 비우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데까지 비우고 현실에 연연하지 않되, 몸은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해 온 몸으로 현실을 살아내는 삶을 꿈꾼다. 그 야무진 꿈이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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