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기

용문산에 오르다

꿈꾸는 식물 2009. 2. 4. 19:46

  지난 가을에 갔던 용문사에 가다.  그 때는 추적추적 비가 내려 노오란 은행잎들이 마구 딩굴어도 겨울인 것만 같았는데, 겨울 한가운데 있는 용문사는 완연한 봄날이다.  모두 노란 은행잎을 달고 있거나 떨구고 있는데, 저 홀로 늦게까지 푸르렀던 용문사의 그 늙은 은행나무는 잎을 모두 떨구고 떨어진 잎 자리마다 봄을 준비하며 그냥 그대로 자리를 지킨다.  몇 달 전인데도 옛일처럼 느껴지는 그 가을날 동창 모임은 이렇게 추억이 된다.  오늘 남편과 함께 하는 산행도 또 추억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으리라 생각하니 애틋하다.

 

  어느 해 겨울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들과 함께 용문사에 온 적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아들 녀석은 계속 넘어진다.  평지에서도 잘 넘어져 '넘어진다, 박승민'이라는 야유를 받는 녀석이기에 꽁꽁 얼어 붙은  용문사 일주문에서 용문사로 가는 절길에서는 아예 작정한 듯이 넘어진다.  급기야 지나가는 나이 지긋한 어느 분께 '엄마 아빠는 등산화 챙겨 신고, 아이는 운동화만 신켜 겨울 산행을 한다'며 꾸중을 들었다.  그래도 녀석은 깔깔대며 기꺼이 그 상황을 즐겼다.  겨울 산사에 울려 퍼졌던 아들 녀석의 웃음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일요일에 태어난 아이답게 늘 태양처럼 밝은 내 아들 승민!  계속 넘어지면서도 미끄럼을 타며 얼굴 가득 크게 웃던 아들 녀석이 마음에 또 먹먹하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그 녀석은 애써 웃고 있지 않을까?  이 년여 수험 생활에 주저 않고 싶어도 녀석은 밝게 웃으며 태양 같은 모습만 내게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넘어지면 미끄럼을 타는 아이,  하늘이 무너지면 하늘 높이 날아 잡을 수 없었던 종달새를 잡을 아이.  신림동을 향해 내 마음을, 내 기도를 보낸다.

 

  많은 산악회 안내 리본 속에서 색다른 리본을 발견했다.  '60 70 실버 부부 300대 명산 산행 기념 등반'이라는 코팅까지 정성껏 한 기념표이다.  남편은 한 달에 4개의 산을 등반한다면, 일 년이면 50개이고, 300개를 등반하려면 6년은 필요하다고 계산한다.  부부가 몸과 마음 건강하게 더불어 함께 300대 명산을 등반할 수 있다면 축복이리라.  남편은 우리도 시도해 보자며 의욕에 차 있다.  더불어 같이 길을 가는 길동무인 내 남편의 마음이 고맙다.  우리 부부는 어떤 점에서는 많이 같고 어떤 점에서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길동무인 것이 고맙고 또 고맙다.  서로 다른 점 때문에 때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럴 때 우리 부부는 이심동체(二心同體)이다.  서로 같은 점 때문에 때때로 서로에게 화를 내기도 하지만, 닮은 점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안스럽게 여긴다.  이럴 때 우리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이다.

 

 

  하산길에 남의 집안 일로 서로에게 얼굴을 붉혔다.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무시하고 혼자서 내려가던 남편이 말을 건낸다.  양평에서 냉면에 완자까지 챙겨서 맥주까지 마시고 나니 그냥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술을 좋아하는 술꾼이다.  몸이 무거워서 조금 힘들게 시작한 산행이었지만 아기자기한 용문산은 걸음걸음 아름다웠다.  겨울 산행이었는데 얼었던 땅이 녹아서 진흙탕을 이루며 봄을 예감한다.  꾸벅꾸벅 졸며 남편의 운전에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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