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기

덕유산 눈꽃

꿈꾸는 식물 2009. 1. 28. 18:57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처음 만났을 때의 엄청난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가능하다면 생각하는 대로 살겠다고 굳게 다짐까지 했었다.  눈 때문에 미뤘던 덕유산 향적봉행을 그믐날인데도 굳이 감행하다.  계속 내리는 눈 속에서 운전하는 남편은 괴로울 텐데 내색하지 않고, 공주 딸이기에 공주일 수밖에 없는(나의 아버지  함자가 김공주씨이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지는 설경에 감탄하며 가끔씩 졸기까지 했다.  익산에서 장수를 지나 진주까지 이어진다는 새로 뚫린 고속도로 덕분에 무주의 접근성은 훌륭했다.

 

  관광 곤도라는 폭설로 등산로가 폐쇄되어 왕복 티켓을 끊으라나.  태백산의 눈꽃이 신록이라면 덕유산의 눈꽃은 녹음 그 자체였다.  아이젠에 패치까지 중무장을 하고 설경이 되기 위하여 설경으로 나가다.  나 스스로 한 폭의 설경이 되어 버리는 환상의 은세계에 열병같은 들뜬 황홀경에 빠진다.  폭폭 내리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내 마음은  하얗게 비워져 간다.  남편 말대로 하얗게 비우고 하나하나 내려 놓아야, 이 산을 내려 가면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  비우고 또 비우고 내려 놓고 또 내려 놓아도 늘 온갖 사념에 시달리는 내 가난하고 남루한 마음이 참 안 됐다.

 

  향적봉에서 바라보는 백련사 하산길에 대한 미련을 접는다.  다음에 언젠가 다음에 또 오리라 생각한다.  그 날, 내 마음의 빛깔은 어떤 빛일까?  어떤 마음으로 이 향적봉에 다시 오를까.  어느 여름 휴가 때 관광 곤도라를 타고 아들이랑 같이 왔었는데, 아들은 지금 신림동에 있고, 나는 이렇게 폭설을 맞으며 향적봉에 있다.  아들과 나의 거리를 생각한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도 심리적 거리는 더 멀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비록 짝사랑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짝사랑이 행복하다.  좋은 것을 보면 같이 보고 싶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 같이 먹고 싶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같이 듣고 싶다.  이 황홀한 은세계를 내 하나뿐인 아들과 같이 만끽하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한편 남편과 같이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작은 위로가 된다.  풍광에 젖어도 나는 결코 풍경이 되지 못한다.  이런 내가 가끔은 한심하지만 모두 해탈하면 가여운 중생은 누가 하겠는가.  풍광에 젖어도 인간일 수밖에 없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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