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좋아하는 단계에도 수능이나 한우처럼 등급이 있다.
신정일 선생님 이야기를 참고로 내 나름대로 등급을 정리해 본다.
일단계는 통도사나 송광사 같은 큰 절을 무조건 좋아하고, 이단계는 무위사나 귀신사 같은 아담한 절을 좋아하고, 삼단계는 봉정암이나 도솔암 같은 암자를 좋아하고, 마지막 사단계가 폐사지를 좋아한다.
동해 해파랑길 두 번째 답사에서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절터와 유명한 감은사지, 두 군데 폐사지를 다녀 왔다.
장항리 절터에는 두 개의 탑과 불상을 떠나보낸 대좌만 넉넉한 봄볕을 받고 있다.
푸르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탑은 뜻밖에도 살구색 - 예전에 표현대로라면 살색-이다.
탑의 재료인 화강암의 일반적인 색이 아닌 독특한 살구빛 색이 주는 느낌이 신선하다.
동탑과 서탑을 만든 장인 솜씨가 너무 현격하게 차이가 나서 스승과 제자가 만들었나 잠깐 생각해 본다.
석조불입상은 경주 박물관에 보내고 남아 있는 대좌에 새겨진 원숭이 비슷한 사자상이 정겹다.
한쪽 팔은 앞으로 뻗고 다른 팔은 방어 자세를 취하며 몸에 힘주어 붙이고, 한쪽 발은 땅에 대어 힘을 모으고 다른 발은 살짝 들어 몸에 대고, 얼굴 가득 장난기와 웃음기가 가득한 사자상의 익살스런 모습에 모두들 즐겁다.
서산 마애불에서 지난 해 봄날 백제의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읽었다면, 장항리 절터 대좌 사자상에서 오늘 나는 신라인의 여유로운 유머와 해학을 읽는다.
보고 또 보고 , 그 익살스런 동작을 따라해 보기도 하고, 그 웃음을 얼굴 가득 떠올려 흉내내어 본다.
그리고 그 사자상을 새겨 넣은 석공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커다란 탑에 비해 주춧돌로 크기를 짐작해보는 금당은 소박하다.
아담한 금당에 광배까지 복원한 석굴암 본존불을 닮은 불상을 모셔 놓고 두 손 모아 합장해 본다.
엄숙한 불상과 익살스런 사자상이 공존하는 자리에서 신과 인간의 만남,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봄날의 햇살,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봄날의 바람, 나지막하게 들리는 도반들의 목소리, 한참 신이 나서 열변을 토하시는 선생님의 음성, 부드러운 살구빛 탑과 대좌의 사자상.
이 모든 것을 다음에 이 곳, 장항리 절터를 찾을 때 떠올리려고 나는 또 마음을 쓰겠지.
내 마음 깊은 곳에 담아 두고 떠나오는 내 등 뒤로 봄볕만이 푸지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작나무 숲에서 (0) | 2011.11.27 |
---|---|
매미 소리 (0) | 2011.08.11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0) | 2011.03.22 |
하이얀 동백꽃 (0) | 2011.03.18 |
박완서 추모시 - 정호승 (0) | 2011.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