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김현선
걷기와 소설 읽기를 사랑하는 우리 땅 걷기 회원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남편을 따라 산에 들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혼자 한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집 앞 올림픽대교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집으로부터 멀어지며 출분(出奔)을 꿈꾸었다. 때마침 불어온 한강 따라 걷기에 힘입어 한강을 따라 청계천을 지나 광화문으로, 중랑천 거쳐 상계동으로, 구리나 하남 거쳐 팔당으로, 하류인 난지도와 김포로, 양재천을 거쳐 과천으로, 탄천을 지나 성남으로, 걷고 또 걸었다. 내 마음이 다른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할 때마다 길을 나섰다.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질 때마다 마치 걷기가 만병통치약인 양 운동화를 신었다. 강을 보며 때로는 하늘을 보며 걷노라면 어느 순간 마음이 하얀 종이로 텅 비어 버리는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의 황홀함이 늘 나를 위로하고, 이 세상과 화해를 꿈꾸게 한다. 그 백지 상태의 몰두는 너무 도도하고 오만해 오래 지속되지도 않고, 다음에는 더 많이 걸어야만 마음을 허락하는 중독성까지 지닌 치유 난해한 불치병이다. 문득 창밖의 한강이 홀연히 나를 부른다. 나는 그 부름을 거역하기 힘들다.
함께 걷자면 때때로 산악인이 되어 산에 들겠다며 걷기를 거부하고, 함께 걷자면 관광객이 되어 드라이브 하겠다며 걷기를 부정하며 나를 놀리는 남편과 많은 길을 함께 했다. 한강과 청계천 여강을 함께 했고, 북한산 둘레길, 예봉산 둘레길, 강화도 능내길을 걸었다.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도 올레길, 삼척의 수로부인길, 대관령의 바우길, 꽃지에서 백사장 해수욕장까지의 안면도를 걸으며 많은 풍광을 만나고 서로 마음의 풍경과 마음의 오지(奧地)와 마주 했다.
내 마음의 명당 자리
광진구에 살고 있어 아차산에서 시작해서 망우리로 이어지는 사색의 길을 즐겨 걷는다. 남편은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아름다운 길을 걸어 보자는데, 나는 ‘내 마음의 명당 자리’로 늘 망우리를 생각한다.
길에서는 늘 나는 철의 여인으로 강자이고, 남편은 약자로 사회적 배려 대상자이다. 등산객으로 번잡한 아차산을 조금 빠르게 통과하니 어느 새 남편은 을(乙)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이 배려하지 못한 나의 부덕의 소치려니 생각한다, 나는 갑(甲)이니까. 343 개의 계단을 내려 망우리로 접어든다. 그 은성했던 산벚꽃이 하롱하롱 흩날리던 봄날,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푸르른 여름, 붉고 노란 잎으로 꽃보다 잎이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웅변하던 가을, 그리고 이제 겨울이다. 산벚나무는 모든 것을 떨구고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겨울 하늘을 향해 순결한 가지를 뻗으며 거기에 있었다. 망우리에서 보는 투명한 겨울 하늘과 모든 것을 내려놓은 나목(裸木)과의 해후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만해 한용운을 만나고, 소파 방정환을 만나고, 독립 운동가인 조봉암 선생과 오세창 선생, 문일평 선생의 기념비를 만난다. 근대 화가 이인성의 묘지를 발견한 것으로 이중섭의 묘를 찾아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도 한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시비를 보며 그의 너무나 짧은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남편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세월이 가면’을 낮게 허밍으로 노래 부른다. 스물 그 푸르른 날 만나 이제 가을날 감국 같은 쉰 둘, 이렇게 세월이 가도 때로 가슴이 아프도록 뛰는 시간을 길에서 마주 한다. 젊은 날의 열정은 시들고, 아직 저문 날의 연민은 배우지 못한 어설픈 결혼력 24년의 나는 남편이랑 나란히 때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길을 걸으며 ‘사랑이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는 생 텍쥐페리의 말을 마음으로 느낀다.
연분홍 벚꽃과 하이얀 조팝나무 꽃에 둘러 싸여 연분홍과 하이얀 꽃잎으로 치장하고 가끔 보랏빛 제비꽃 머리에 꽂고 있던 꽃무덤은 하이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다. 비석에 새겨진 생몰(生沒) 연대를 보며 부질없이 망자(亡者)의 나이를 계산한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신 곳’이라는 비석 옆면에 새겨진 묘비명을 보며 내 묘비명을 생각한다. 이 묘지 묘지에 누군가가 사랑했고 누군가를 사랑했던 이들이 영면하고 있다. 눈을 이고 겨울을 견뎌내는 이 묘지를 남겨진 이들은 가끔 생각이나 할까? 길은 길을 만들며 구리 둘레길로 이어진다.
똑같은 길을 걸어도 누구랑 함께 걷는지 어느 계절 어느 시간에 걷는지에 따라, 길은 각기 다른 빛깔과 향기로 다가 온다. 혼자 걷는 길, 남편과 걷는 길, 아들과 걷는 길, 친정 엄마를 앞세우고 걷는 길, 우리 땅 도반들과 무리 지어 걷는 길은 같은 길이어도 모두 다른 길이다. 한 번 걸었던 길은 다음에 걸을 때는 추억으로 다가와 내 마음의 길이 된다.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이 된다. 그때 함께 걸은 발자국, 그때 함께 나눴던 이야기, 그때 함께 나눴던 마음의 언저리를 찾아 떠나는 길이 된다. 히크메트의 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고,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는 ‘가장 아름다운 길은 아직 걷지 않는 길이다’에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굳이 여럿이 무리를 짓지 않아도, 길은 곳곳에 있다. 운동화를 신고 한 걸음 나서면 그 첫 걸음이 다음 걸음으로 이어져 길을 걷고 떠나게 된다. 짧은 교직을 끝으로 결혼하여 쉰까지 다른 사회생활 없이 집순이였던 나 역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시작하여 이제 걷기와 깊은 사랑에 빠져 버렸다. 무엇이든지 처음은 어렵고 두려워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망설이는 그대, 이제 길을 따라 나서기를. 그래서 잃어버린 그대 자신을 만나기를.
주말 아침 남편이 겨울 보내기 걷기에 나서잔다. 집 앞 올림픽대교 북단으로 한강 시민공원에 들어섰다. 방향을 잡지 못해 망설이는 나를 뒤로 하고 남편은 구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박완서 선생님의 아치울에 가자는 남편 뒤를 기꺼이 따라 걷는다. 길은 길로 이어져 끝없이 흐르고 우리네 삶도 이어져 이렇게 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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