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 이사온 다음 해 그러니까 2007년 봄 어느 날 속절 없이 키만 크다고 친정엄마가 동백나무에 과감하게 전지가위질을 하셨다.
동생이 갑자기 다리를 다쳐 기브스를 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딸들 집에 오래 머무르셨던 엄마가 동백나무 두 그루에 한수 가르침을 하셨다.
지난 해 이사하며 분갈이를 할 때 비료를 많이 주어서인지 키만 쑤욱 자라있는 붉은 동백나무와 하얀 동백나무에 처절할 정도로 가위질을 하셨다.
그리고 두 해 쯤 지나자 붉은 동백나무는 크고 붉은 꽃송이를 피어내는데, 하얀 동백나무는 소식이 없었다.
붉은 동백나무가 빠알갛게 필 때면 동생 훈이를 생각하며 쓸쓸해지는 내 마음을 하얀 동백이 피어 위로해 주길 바랐는데 올해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베란다에 나가보니 동백나무 아래 쪽에 기적같이 하얀 꽃망울이 매달려 있었다.
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잎이 되어 버린 허망한 경험이 많기에 부러 믿지 않았는데, 하얀 꽃망울은 점점 부풀어 오르고, 드디어 꽃으로 피어났다.
한 송이도 아닌 무려 세 송이씩이나!
이사오기 전에 개미의 기습으로 죽도록 고생했던 하얀 동백, 뿌리마다 개미집이 빽빽하게 들어 있어 약을 뿌리고 또 뿌리고, 겨울이 되어서도 새 집으로 오지 못하고 추운데서 떨어야만 했다.
그 안스러운 녀석이 이제 꽃이 되어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눈물겨운 눈으로 하이얀 동백꽃을 바라본다.
이렇게 피어 날 것을.
그동안 꽃으로 피어날 꿈을 얼마나 꾸었을까.
꽃으로 피어나면 그것 뿐인데.
가슴이 먹먹하다.
꿈꾸는 식물, 너는 아직도 꿈꾸고 있니?
꿈을 내려 놓은 자리에 나는 이렇게 있다.
꿈을 잃은 자리에 융단폭격을 맞은 채 나는 이렇게 있다.
이제 다시는 어떤 맹세나 다짐은 하지 않으리.
그러나 다짐이나 맹세하지 않으리라는 이것도 또 다른 다짐이며 꿈인 것을.
다시는 꿈꾸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아직도 유효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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